ADORO, ERGO SUM
         -꽃 한 송이와 이사악

Adoro, ergo sum, 한 때 내가 지어낸 모토였다. Cogito의 패러디다.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그들도 회개하고 싶어서, 예수님께 표징 하나 요구했을 때, 눈먼이가 뜨고 병자가 낫고 가르침이 새로워도, 이 모든 것 말고 그 어떤 것을 다시 기다릴 때, 예수님은 “악하고 절개 없다” 하셨다. 마음 아픈 꾸중이시다. 결국 결론은 흠숭이었다. 믿음은 곧 희생이어서 흠숭만하며 살고 싶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리 인간이 할 일은 이뿐일 듯 했다.

기적 같이 얻은 이사악을, 하느님이 바치라 하시니 정말 바치려고, 천진난만한 아이를 달래어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던 아비의 갈등은 어떠했을까.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믿음의 조상! 한 마리 양도 아니고, 두 마리 산비둘기도 아니고, 자신의 아들이었다!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 하시고,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그 외동아들을 희생으로 바치라시다니! 그래서 믿음은 곧 희생이며, 달리 할 일은 흠숭이다 싶었다.

김종삼(1921-1984)이라는 시인이 우리에게 있었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그의 '묵화(墨畵)'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그는 황해도 은률 출신으로 그의 시비가 선 경기도 포천시 소홀읍 고모리 수변공원에는 다음 시가 소리 없이 북한을 향해 외치고 있다.

     민간인 -김종삼-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境界線)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 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孀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해설이 마음에 든다.
* 용당포 → 38선이 그어진 곳, 월남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시와 경계가 삼엄하던 곳.
*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 삼엄한 경계 속에서 남하하던 사람들이, 느닷없이 터진 아이의 울음소리에 당황해서, 아이를 바다 속에 던졌던 비정한 비밀이 숨어 있는 곳.
*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 역사적 비극이 세월의 흐름에도 잊혀지지 않고.
* 수심(水深) → 분단 비극의 깊이를 암시하는 말, 통곡의 깊이.
* 주제 → 민족 분단의 비극성
* 제목 "민간인" → 군인도 관리도 아닌 '보통사람'이라는 뜻으로,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겪어야 한 비극적 상황을 민간인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려 한 의도적 제목

통일이 되는 날, 염체 없지 않으려고, 나도 무언가 했다고 말하려고, 자기 전 공동체로 주모경을 열심히 바친다.

희생에 대하여 이야기하려다 이야기가 장황해 졌을까. 개신교 교회를 들어가면 썰렁한 느낌이 든다고 우리는 말한다. 우리 성당에는 성체가 모셔져 있어서 성당이다. 살아계신 분이 계신다. 그래서 감실 옆에는 성체등이 있다. 전등이 나오기 전 옛날에는 촛불을 켰고, 밤중에도 심지가 닳아 꺼지지 않게 하려고 적당한 시점에서 등을 교체했다. 여기 어느 분이 현존하신다고 빛으로 밝히는 일 외에, 닳아가는 초는 생명을 태워 바친다는 번제의 의미를 담았다. 지금에는 전등으로 바뀌었으나 그 함의는 같다.

성체등을 켜듯 우리는 기꺼이 꽃을 바친다. 아름답게 하는 기능도 있겠으나 아브라함의 이사악 희생처럼, 생명을 꺽은 한 송이 꽃의 희생이다. 돈 보스코는 성당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으셨다. 마더 데레사도 마찬가지라 했다. 우리들의 성당에는 우리 없는 동안에도 우리 대신 흠숭과 찬미노래를 드릴, 적어도 한 송이 살아있는 꽃과 은은한 성체등이 님과 함께 희생제사를 이어간다.  Adoro, ergo sum, 흠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