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명의 벨기 청년들과 하신 교황님의 인터뷰

(2014331)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윤선규 루카(S.E. Mons. Lucas Van Looy) 주교의 인도를 받은 벨기 청년들과 하신 인터뷰의 내용을 여기에 소개한다. 청년들은 영어로 질문했고 교황님은 이탈리아어로 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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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이하 질) 이들은 지난 해 리오에서 있었던 세계청년대회에 참여했던 사람들로 자신들이 그곳에서 뭐를 했는지에 대해 피아밍기(벨기 북부지방) 청년들에게 알리려 노력하는 친구들입니다. 12명인데 다 함께 왔으나 나머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황님, 이하 교) 그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싶어요. 끝나고 합시다.

) 자 그럼 시작할까요. 이 친구들은 자신들의 그리스도인적인 생각으로부터 출발하여 미디어 세계에 들어가고 침투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질문들을 드릴 것입니다. 이 여자 친구는 신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그룹에 속하는 사람은 모두 4명이지요. 얘는 믿지는 않지만 저희들이 생각하기에 벨기 사회가 매우 평신도적인 것이기에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여지고, 저희 모두를 위한 메시지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얘도 매우 만족하였습니다.

) 좋습니다! 우리 모두는 형제이니까요!

) 정말 그래요. 첫 째 질문은, 저희들의 청원을 받아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왜 이를 받아들이셨는지요?

) 한 젊은이가 불안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 때, 저는 그 젊은이를 도와줘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 불안이 하나의 씨앗이 되고 나아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 순간 저는 여러분들의 불안에 대해 여러분들과 함께 하기에 가장 가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 지금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저희들이 사전 질문을 받았는데요. 성하께서는 행복하신지요. 그렇다면 왜 그런신지요?

) 진정, 정말로 저는 행복합니다. 내가 행복한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할 일이 있고, 실업자가 아니니, 나는 일이 있고, 사목자의 일 말입니다! 저는 삶에서 내 길을 찾았기에 행복하고 이 길을 가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리고 평온한 행복을 누립니다. 이 나이가 되면 젊은이들이 느끼는 행복과는 다른 행복을 누리지요. 차이가 있습니다. 내면적인 평화, 큰 평화가 있으며 역시 나이를 먹어 오는 행복도 있습니다. 삶의 여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리고 지금도 문제들이 있지만 이 행복이 그런 문제들 때문에 사라지지 않아요. 아닙니다. 문제를 보고, 고통을 당하지만 앞으로 나갑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뭔가를 하고 앞으로 헤쳐나갑니다. 그렇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 이 평화와 행복이 있습니다. 제게 있어 이는 정말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합당한 나의 자격이 없는 그런 큰 은총이지요.

-) 성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성하께 이런 것들이 왜 중요한지요?

)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님과 그 복음을 믿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가난한 이들에게 하는 선포입니다. 행복선언을 읽으면, 예를 들어 마태오 25장을 읽으면, 예수님께서 이것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복음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나는 가난한 이들에게 해방과 구원과 하느님의 은총을 선포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은 사회 안에서 받아들여져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읽으면 예수님께서는 소외받는 이들을 택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나환자들, 과부들, 고아들, 소경들…. 소외된 사람들이지요. 큰 죄인도 그렇고요. 이것이 내게는 큰 위안이 됩니다. , 주님께서는 죄에 경악하지 않으시잖아요! 도둑이었던 자케오같은 이를 만났을 때 혹은 돈 때문에 조국을 배신한 마태오같은 이를 만났을 때 그분은 놀라지 않으세요! 그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을 택하셨어요. 이 역시 가난, 즉 죄의 가난입니다. 나에게 있어 복음의 핵심은 가난한 이들입니다. 두 달 전에 어떤 사람이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선택하는 것을 두고 이렇게 말했어요. “이 교황는 빨갱이다.” 아니요! 이것은 공산주의 것이 아닌 복음의 깃발입니다. 복음의 것! 이념이 없는 가난, 가난 말입니다. 그렇기에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님 선포의 중심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읽어보면 압니다. 문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행동이 가끔은 역사 안에서 이념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념은 다른 것입니다. 복음에 간단히 아주 간단히 그렇게 나옵니다. 구약에서도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것을 항상 중심에 둡니다.

-) 저는 하느님을 믿지 않지만 성하의 행동과 생각에 영향을 받습니다. 성하께서는 우리 모두, 그리스도인 젊은이, 믿지 않는 젊은이, 혹은 다른 신앙을 가졌거나 다른 방식으로 믿고 있는 모두를 위한 메시지를 가지고 계시는지요.

) 말하는 방법에 있어서 진실된 것을 찾으려 해야 합니다. 내게 있어 진실 된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지금 형제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형제입니다. 믿는이, 믿지 않는이, 그리스도 신앙이든 다른 것이든, 히브리, 무슬림, … 우리 모두는 형제입니다. 인간은 역사의 중심이었고, 이것이 내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이 중심이라는 것 말입니다. 지금 이 시대적 상황은 인간이 중심에서 쫒겨나 변두리로 미끄러졌어요. 그리고 적어도 이 순간에 그 중심을 권력과 돈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남여 인간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왜 젊은이? 젊은이들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긴 여정에서 결실을 만들어 줄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방금 말씀들인 것과 연계하여, 이 세상에서 권력과 돈이 중심인 곳에서는 젊은이들이 쫒겨났습니다. 어린이들이 쫒겨나서 아이들을 원하지 않거나 훨신 적게 원합니다. 작은 가족말입니다. 아이들을 원하지 않아요. 노인들이 쫒겨났어요. 많은 노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안락사로 죽어갑니다. 그들을 보살피지 않으니 죽어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 젊은이들이 쫒겨났어요. 생각해 보세요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 25세 미만 중 거의 50%의 청년실업자들이 있어요. 스페인에서는 60%, 남스페인인 안달루시아는 70%에 달합니다. 벨기의 청년실업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 약간 낮습니다. 5-10%….

) 매우 적네요. 매우 적어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일자리가 없는 청년 세대가 뭘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세요! “사회가 먹을 것을 주기 때문에 그들은 문제없이 먹고 삽니다.”라고 말 할 수 있겠죠.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집으로 빵을 가져갈 수 있는 존엄성의 경험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청년 고난'의 순간입니다. 우리는 폐기의 문화 속으로 진입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세계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폐기됩니다. 노인들, 어린이들, 청년들. 하지만 아이들과 청년들 속에 그리고 노인들 속에 민족의 미래가 있기에, 이렇게 민족의 미래를 폐기하는 것이 됩니다. 아이들과 청년은 역사를 앞으로 끌고나가며, 노인들은 우리에게 한 민족으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민족의 기억을 줘야 할 사람들이기에 그렇습니다. 만약 이것들을 폐기한다면 청년과 아이들을 적게 가질 것이며 기억이 없을 것이기에 힘이 빠진 군집만 남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역사적으로 힘든 시기를 지나는 청년들이 사회 안에서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믿습니다.

) 성하께서 하시듯 우리도 다른이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주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실 매우 구체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계신지요?

) 중요한 말을 했어요. “구체적인!”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가면서 앞으로 나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상만 가지고는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해요. 저는 여러분 젊은이들이 삶에서 이런 구체성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믿어요. 상황에 묶인 행동으로 매우 자주 이것 저것을 치밀한 계산으로 취해야 할 것입니다만. 한가지 말씀드릴께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을 때 나에게 인사하기 위해 오는 젊은 정치가들에게 말했어요. 좌파가 됐든 우파가 됐든 그들이 새로운 노래를 말하고 새로운 스타일의 정치를 말하기에 만족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에 나에게 희망을 줍니다. 저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넓게 그리고 앞으로 나가야한다고 믿습니다. 용기를 지닌 젊은이들이 제게 희망을 줍니다. 내말이 답이 됐는지 모르겠는데, 구체적으로 행동하십시오.

-) 신문을 읽거나 제 내면을 바라볼 때, 인류가 정말 이 세상과 인류를 책임질 능력이 있는가 하고 자문합니다. 성하께서도 저의 이런 의혹에 동의하시는지요. (통역자) 성하께서 말씀하셨 듯이 폐기합시다. 성하께서도 가끔은 이런 의혹은 느끼시는지요. '이것들 안에 하느님 어디 계시는가?' 하는 의혹이나 질문을 하시는지요.

) 이 질문에 대해 두 가지를 자문합니다. 하느님은 어디 계시고 인간은 어디에 있나? 성경의 말씀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하신 첫째 질문은, “아담아 너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저 역시 자문합니다. “21세기의 인간아, 너 어디에 있느냐?” 이것이 내게 역시 다른 질문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느님, 어디 계십니까?” 사람이 자신을 만났을 때 하느님을 찾습니다. 혹시 그분을 찾는 데 실패할 수도 있지만, 바른 길을 가고 진리를 탐구하며 선의 길과 미의 길을 추구합니다. 저게 있어 진리를 사랑하고 찾는 젊은이는 선을 사랑하고, 착하며 착한 사람이며, 미를 추구하고 이를 사랑하며, 좋은 길에 서 있고, 확실한 하느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일찍 혹은 조금 늦게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길은 멀고 어떤 이는 이를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인지적인 방식으로 만나지 못 할 뿐입니다. 자신에게 진실하고 정직하며, 선하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며, 언제나 은총인 하느님을 만남의 능력을 지닌 매우 성숙한 인격을 결국 갖출 것입니다. 하느님과 만남은 은총입니다. 우리는 길을 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을 통해 하느님을 만납니다. 만들 가치가 있는 길입니다. 누구든 인격적으로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에 대해 말을 듣는 것으로 하느님을 만나지 않으며,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값을 치루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그렇게 만나하는 것은 각자의 길입니다. 질문에 답이 되었나 모르겠네요.

) 우리는 모두 인간이고 실수를 합니다. 성하는 실수를 통해 뭐를 배우셨는지요?

) 나는 실수들을 했고 실수합니다. 성경 지혜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바른 사람이 하루에 일곱 번 실수한다! … 모두가 실수를 한다는 말이지요. '사람만 똑같은 자리에서 두 번 넘어지는 동물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자신의 실수로부터 즉각 배우질 않는다는 말이지요. 누군가는 “나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발전이 없겠죠. 이런 자세는 허영과 교만, 자만을 불러옵니다. 나의 삶에도 실수들이 있었고 그런 실수들은 삶의 큰 스승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큰 스승으로서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 잘난 남자 잘난 여자가 된 것처럼 느낄 수 있으나, 실수를 하게 되고 실수가 겸손하게 만들며 제자리를 찾게 합니다. 제가 모든 실수로부터 뭔가를 배웠다고는 말할 수 없겠죠. 아닙니다. 사실 내가 좀 완고한 편이라 어떤 실수로부터는 배우지 않았을 것이고, 실수에서 배우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실수로부터 배웠고, 이것이 나에게 이롭게 작용했습니다. 실수를 인정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해요. 나는 여기서 저기서, 여기저기서 실수를 했어요. 그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같은 우물에 빠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것들이 가르침을 주기에 실수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겸손해지도록 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겸손은 사람들에게 또 우리 스스로에게 매우 좋은 일을 합니다. 답이 됐는지 모르겠네 ….

-통역자) 실수로부터 배운 것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신다면요? (질문을 한 여자 아이)가 감히 드린 ….

) 아닙니다. 말씀드릴께요. 공개적으로 책에서 한 말인데…. 예를 들어, 교회 생활의 운영과 관련해서 나는 매우 젊었을 때 장상으로 임명되었어요. 나는 권위주위로 정말 많은 실수들을 했지요. 36살인 제가 갖기에는 너무 큰 권위였지요. 그러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어야 한다는,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어요. 그렇다고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배우는 것은 아니지요. 아녀요. 길은 멀지요. 이것이 구체적인 예입니다. 저는 수도회의 장상으로서 나의 권위주의적인 태도로부터 너무 권위적이지 않고 지나치지 않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어요. 하지만 지금도 실수를 하고 있지요! 됐나요? 다른, 지르고 싶은 질문이 또 있니?

-) 저는 다른이들에게서 하느님을 보는데 성하는 어디서 하느님을 뵙나요?

나는 믿는데, 그분을 우리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만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분을 찾지요…. 성경을 읽으면서, 성사를 거행하면서, 기도 중에, 일하면서 사람들 가운데,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그분을 만납니다. 특히 병든이들에게서 그분을 만나지요. 병든이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들은 내게 '이 사람은 그런데 왜 나는 아닌가?'라는 질문을 하게 합니다. 감옥에 가친 이들과 함께 있으면 '이들은 갖혔는데 나는 왜 아닌가?'하는 질문으로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께 묻습니다. “항상 불공평하십니다. 이들에게는 가시면서 왜 내게는 아니십니까?” 저는 그들 가운데서 하느님을 뵈오며, 항상 대화 속에서 만납니다. 온 종일 그분을 만나기 위해 애쓰는 것이 내게는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는 못하지만, 그분과 대화 속에 있을려고 노력합니다. 나는 꼭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성인들은 그것을 잘 하셨습니다. 저는 아직 아닙니다만, 이것이 길입니다.

-) 제가 하느님을 믿지 않기에 성하께서 어떻게 기도하시는지와 왜 기도하시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기도하시는지 그리고 왜 기도하시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가능한한 보다 구체적으로 말입니다.

) 어떻게 기도하냐고…. 자주 성경을 펼쳐, 조금 읽고, 덮은 후 주님이 저를 보시도록 내버려둡니다. 이것이 아마 내가 드리는 기도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그분이 저를 바라보시도록 나를 둡니다. 나는 느끼지만 이것은 감각적인 것이 아닙니다. 깊은 곳에서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어떤 때는 말씀을 하시지 않아요…. 전혀, 공허, 공허, 공허…. 하지만 인내롭게 그곳에 남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드립니다. 난 무릎이 나쁘기 때문에 자리에 앉아, 앉아 기도드립니다. 가끔 기도 중에 졸기도 합니다. 이것 역시 하나의 기도드리는 방법입니다. 마치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있는 아들로서 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있는 아들로서 내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 일이 중요합니다. 왜 기도하냐고? 무슨 이유로 아니면 누구를 위해서?

) 두 가지 다…

) 내게 필요하니까 기도드립니다. 마치도 하느님께서 내게 말씀을 하실려고 부르시듯이 내가 등 떠밀리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첫째이고, 아픈 사람들,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 등 제 가슴을 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을 위해 기도 드리고, 예를 들어 전쟁처럼 문제 상황에 대해 기도를 드립니다. 오늘 시리아 주재 바티칸 대사를 만났는데 내게 사진들을 보여줬어요. 오늘 저녁에 이를 위해 그 곳의 백성들을 위해 기도드릴 것입니다…. 굶어죽는 사람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 우리가 세상 모두 먹을 만큼 제공할 수 있는 것을 가진 이 시대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질 못하겠어요. 나에게는 전율입니다! 이런 것들이 내게 기도드리게 합니다. 바로 그 백성들을 위해서 말이지요.

) 저는 저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성하의 두려움은 무엇인지요?

) 나 자신에 대해! 두려움…. 복음을 보세요. 예수님은 여러 번 반복하십니다. “두려움을 갖지 마라! 두려워 하지 마라!” 여러 번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왜 그럴까? 주님께서는 두려움이란 정상적인 것임을 아시기때문이지요. 우리는 삶에 대한 두려움, 도전 엎에서의 두려움, 하느님 앞에서의 두려움… 등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모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을 갖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을 느껴야 하지만 가질 필요는 없고, “내가 왜 두려워하지?”를 생각하면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자신 스스로 앞에서 상황을 분명하게 하거나 혹은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꾀하세요. 두려움은 나쁜 권고를 하기 때문에 좋은 상담가가 아닙니다. 그릇된 길로 인도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움을 갖지 마라! 두려워 하지 마라!” 그리고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알아야 합니다. 각자는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하고, 더 많이 실수하는 곳이 어디고 두려움을 더 갖게 되는 곳이 어디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좋은 두려움과 나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두려움은 조심성과 같은 것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자세입니다. 나쁜 두려움은 자신을 지워버리고 가치를 떨궈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무력하게 만들어 아무것도 못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나쁜 두려움이고 멀리 던져버려야 할 것입니다.

-통역자) (여자 아이)가 이 질문을 드린 이유는 벨기에서 종종 자신의 신앙에 대해 말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믿지 않기에 얘는 “증거하기 위한 힘을 원하기 때문에 나는 이 질문을 드릴 거야.”라고 말했었습니다.

) 아하, 이제 질문의 배경을 알겠습니다. 단순함으로 증거한다! 신앙을 가지고 깃발을 흔들 듯이 십자군처럼, 개종을 시키겠다고 간다면 안 됩니다. 가장 우수한 길은 증거, 겸손한 증거입니다. 개선주의가 아닌 겸손함으로 “나는 이렇다.”라고 말입니다. 개선주의는 우리의 또 하나의 죄이고 하나의 나쁜 행실입니다. 예수님은 개선장군이 아니셨고, 역사도 우리에게 개선장군이 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개선장군들이 다 패망했기 때문입니다. 증거, 이것이 열쇠입니다. 겸손으로, 개종으로 접근하지 않고 신앙을 제공합니다. 이렇게 할 때 두려움을 주지 않고 십자군이 되지 않습니다.

-통역자) 마지막 질문이 있습니다.

) 마지막? 항상 마지막이 겁나는 건데…

) 저희의 마지막 질문은, 성하께서 저희에게 묻고 싶으신 질문이 있는지요?

)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질문은 내가 던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질문을 듣고, 여러분들에게 이 순간 이 질문이 맞다고 생각하여 드립니다. 여러분들의 보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어디에 머뭅니까? 어떤 보물 위에 여러분들의 마음이 머물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보물이 있는 곳에 여러분들의 삶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보물에 달라붙어 있습니다. 권력, , 명애, 등등…. 혹은 선, , 선행의 의지…. 많은 보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보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질문을 던지지만, 여러분들 스스로에게 답을 하십시오. 각자 혼자! 집에 가서….

) 편지로 답을 올려드리겠습니다.

) 주교님께 하시면 됩니다. 여러분들께 감사, 감사, 감사드립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서정관수사님께서 번역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