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라 비쿠냐(Laura VICṴNA)

 

라우라 비쿠냐는 1891년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출생하였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의 어머니는 두 딸을 데리고 아르헨티나로 피난하였다. 1900년에 라우라는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하였고, 그 이듬해에 첫영성체를 하였다. 그는 도메니코 사비오처럼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고행하며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고, 예수님을 알리고 예수님께 드리는 모욕을 보상하기로 결심하였다.

어머니가 죄의 상태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어머니의 회개를 위하여 자신을 주님께 바치고 고행을 배가하였으며, 고해 사제와의 합의 하에 복음적 권고를 지키기로 서원하였다. 희생과 질병으로 소진된 그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 밤에 엄마에게 고백하였다. “엄마, 저는 죽어요. 오래 전에 저는 엄마의 회개를 위해 예수님께 제 목숨을 바치기로 했어요. 엄마, 제가 죽기 전에 엄마가 통회하는 모습을 보는 기쁨을 누릴 수는 없을까요?” 라우라는 1904122일 저녁, 그 기쁨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바히아 블랑카(아르헨티나)의 도움이신 마리아성당에 안치되었다. 라우라는 순결과 효성, 희생의 서사시였다. 그는 1988년에, 카스텔누오보 돈 보스코(아스티)젊은이들의 진복 언덕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시복되었다.

 

복자 제페리노 나문쿠라

 

제페리노 나문쿠라(Zefferino Namuncura)는 파타고니아(아르헨티나)의 리오 네그로 강변에 있는 침파이(Chimpay)에서 1886826일에 태어났다. 18881224일에 살레시오회원 도메니코 밀라네시오(Milanesio)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 마누엘은 인디언 아라우카네 부족의 최후의 위대한 추장이었으며, 3년 전에 아르헨티나 공화국 군대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다.

천성이 선량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아이였던 제페리노는 그의 소년기를 평화로운 전원생활로 보냈다. 11살 때 아버지 마누엘은 제페리노를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살레시오회가 운영하는 학교인 비오 9학교에 보내어 공부하게 하였으니, 그 이유는 장래에 자기네 종족을 수호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살레시오 기숙학교에서 숨쉬는 가족적 분위기는 그로 하여금 돈 보스코에게 빠져들게 만들었다. 기숙학교에서 영적 차원이 성장하였고, 자기 종족을 복음화하기 위하여 살레시오 사제가 되겠다는 열망이 솟구치기 시작하였다. 도메니코 사비오를 모델로 정하고 5년 동안 전혀 새로운 문화 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비상한 노력을 한 결과 그 자신이 또 다른 도메니코 사비오가 되었다. 기도, 애덕, 매일의 의무수행 노력과 수덕 실천에 있어서 모범생이 되었다.

1903년에(당시 제페리노는 16세 반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80세 때) 세례를 받았다. 요한 갈리에로 주교가 주교관 소재지 비에드마(Viedma)에 있는 지원소에 그를 받아들여 사제직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였다.

그의 허약한 건강 때문에 살레시오 회원 주교는 그를 이탈리아로 데려가기로 결정하였다. 그에게 더 적당할 것으로 생각되는 좋은 기후 속에서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미켈레 루아와 교황 비오 10세를 만났는데, 비오 10세는 감동하여 그에게 축복을 주었다. 토리노 학교를 다녔고, 이어서 프라스카티에 있는 빌라 소라 살레시오 기숙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매우 열심히 공부하여 반에서 2등을 하였다.

그러나 아마도 그가 절대로 아프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때에 진찰받지 못한 병이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1905328일에 로마 티베리나섬 파테베네프라텔리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이미 늦었다. 그곳에서 511일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1924년에 그의 유해는 그의 조국 포르틴 메르세데스에 안장되었고 그때부터 많은 순례자들이 그를 공경하기 위하여 이곳에 모여들고 있다. 20071111,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하여 그의 고향 침파이(Chimpay)에서 시복되었다.

 

복자 아르테미데 자티

 

아르테미데 자티(Artemide ZATTI)는 보레토(이탈리아 에밀리아)에서 18801012일에 태어났다. 그는 일찌기 희생을 체험하게 되었다. 9살이 되었을 때 이미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벌어야 했다. 가난에 밀려 1897년 초에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바히아 블랑카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아르테미데는 살레시오 회원들이 이끄는 본당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살레시오 회원이 되라는 조언을 받았고, 요한 갈리에로 주교가 그를 지원자로 받아들였다. 이미 스무 살이 된 그는 베르날(Bernal) 분원에 들어가 폐결핵을 앓고 있는 젊은 사제를 간호하는 업무를 받았다. 아르테미데도 그 병에 감염되어 비에드마(Viedma)에 있는 산 호세 병원으로 보내졌다. 이곳에서 그는 특히 사제이며 임상의인 에바리스토 가로네 신부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는 환자들을 보살피는 일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그 사제와 함께 도움이신 마리아께 청하여 치유의 은혜를 받았다.

병이 치유되었고,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1908년에 종신서원을 하였다. 처음에는 병원에 딸린 약국에서 일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 병원을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었으며, 그 병원은 그의 성덕을 닦는 훈련장이 되었다. 그는 환자들에게 절대적인 헌신을 하였다.

1913년 새로운 병원 건축책임을 맡아 병원을 지었는데 그 병원은 1941년에 신생 비에드마 교구 주교관 터로 내주기 위하여 헐렸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다른 병원을 마련하였다.

돈 보스코처럼 그의 사업의 첫째이며 확실한 수입원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암에 걸려 1951315일에 숨을 거두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414일에 그를 복자로 선포하였다. 그의 유해는 비에드마의 살레시오 성당에 안치되었다.

 

라우라, 제페리노와 자티의 삶의 증거안에서 살레시오영성체험을 강화하기 위해 무엇을 발견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