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주년 기념 3일 기도


불의 땅, 파타고니아의 선교 역사에서 매우 의미깊은 살레시안 형제, 요셉 파냐노 몬시뇰 서거 100주년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3일 기도는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거의 세상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에서 마지막까지 모든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 준 남녀 선교사들의 삶을 통해 주님께 감사드리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선교에 대한 열린 마음을 주시도록 한마음으로 일치합시다.


Mons. GIUSEPPE FAGNANO (몬시뇰 요셉 파냐노)

 

불의 땅 파타고니아의 남부 지목구장(Prefetto apostolico) 몬시뇰 요셉 파냐노

 

이태리 아스티지방 Rocchetta Tanaro에서 184439일 탄생하시고,

1864919일 토리노에서 교사가 됨. 1868919일 카살레에서 사제가 됨.

칠레 산티아고에서 1916918일에 선종하심.

 

* 3일 기도

푸에기니의 사도 MONS. GIUSEPPE FAGNANO의 선종 100주년 기념을 위하여

 

첫째날 2016915

알고 숙고하기: 돈보스코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중에서, FRANCESCO MOTTO >

 

100년 전 칠레 산티아고에서 돌아가신 매우 뛰어난 선교사 Monsignor Fagnano,

마젤란해협을 통과해서 불의 땅에 발을 디딘 첫 번째 살레시오회원.

 

돈보스코처럼 아스티출신 (Rocchetta Tanaro, 1844), 신학교없는 신학생, 되다만 가리발디의용군으로 15세에 발독코에 들어와 하급체육관학교 안에서 가르치는 일을 통해 1868년에 대학교 졸업자격을 얻었다. 같은 해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토리노의 란조(1863-1872)의 기숙학교에서 교사로 바랏제에서는 경리일을 했는데, 1875년에 돈보스코는 그를 첫 번째 선교사 그룹에 넣어 이태리 밖의 첫 번째 기숙학교 S. Nicolas de los Arroyos의 원장으로 아르헨티나에 파견한다. 돈보스코는 그의 가리발디의용군의 출신의 대담성을 주시하면서 그 이유로 그의 헌신을 신뢰하면서 1880년에 파타고니아의 첫 번째 살레시안의 집인 카르멘 데 카날레스의 본당의 운영을 그에게 맡긴다. 그곳은 로카장군의 사막의 정복에 의해 내쫓김을 당했던 광활한 초원의 인디언들을 향한 이상적인 전초지점이었다.

 

파타고니아에서 파냐노 신부는 주로 반성직주의자들인 유럽이민자들과 아프리칸 노예들의 후손인 흑인들과 인디언들의 이질적인 공동체를 조직하면서 전례와 교육을 위한 건물들을 건축하며 피에몬테인의 추진능력을 발휘하였다. 188312월에 교황청은 그를 지목구장으로 임명했는데- 살레시오회에서 처음으로 - 남부 파타고니아의 포클랜드와 마젤란해협을 건너 확장된 섬들을 관할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칠레(1887)에 있는 푼타아레나스(1887)로 가기 위해 아르헨티나를 떠날 대기를 하던 중, 1884년에 추부트(Chubut) 안에 인디언 보호구역"을 기획하기 위해 도착하면서 리오네그로 계곡 원주민들 그룹들과 접촉하였다.

 

세상의 끝에서

 

푼타아레나스(1500 ab.)에서, 작은 선박의 주인들, 금채광업자, 모험가, 세계적인 상업인들의 해인 그해 중반에, 몬시뇰 파냐노는 그의 활동의 우선적인 장인 불의 땅에서 군대의 탐험원정대나 fueghine종족을 더 잘 알기위한 목적의 과학적 탐험대의 일원이 되어 활동을 했다.

마젤란해협을 통과해서 불의 땅에 발을 디딘 첫 번째 살레시안이었다. 1892년에 발견된 호수(길이100km)는 파타고니아의 남쪽과 섬들 안에 다른 장소들처럼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푼타아레나스에서, 정치적-관료적 적대감을 이겨내면서 위험을 무릅쓰며 젊은이들을 위한 오라또리오와 전례의 장소들 기숙학교의 기초를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면서 헌신하였다. 살레시오회원 건축가 돈 베르나베의 도움으로 처음으로 도시의 모습을 빠르게 바꾸는데 공헌할 수 있는 발명품인 그 지역의 재료를 혼합한 벽돌을 생산했다.

1889년에 도움이신 마리아호라는 소범선을 구입하여 다양한 fueghine종족을 접하는데 더욱 쉽게 되었다. 불의 땅의 커다란 섬들을 통과하면서, 1890년 초 고생을 많이 한 몬시뇰 파냐노는 광활한 땅위에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매우 부정확하고 불안정한 방법으로 토지를 얻어서 살레시안과 FMA, 인디언onas족을 위한 건축을 준비했고 수백마리의 양류와 황소류를 확보했다.

이러한 선교센터 칸델라리아의 성모님으로 이름이 붙여 - 오늘날 국가적 기념비 - 그들은 18961212일 황폐화시킨 화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0여 년 동안 원주민들은 수없이 유입되었다. “토리노라고 명명한 증기선 선박의 구입으로 푼타아레나스와의 신속한 접촉이 보장되었는데 살레시오회 역사 안에서 또 다른 새로움이 되었다. 동시에 지목구의 관할구역 안에서 그 같은 해에 살레시안들이 포클랜드 (1891), 우수아이아 (1904)와 다른 곳에 갔던 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정부의 남부토지에 대한 냉정한 점령은 칸델라리아의 인디언들을 위한 보호구역 기획 실행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재빨리 목축업회사로부터 지역주민을 위한 농업기술학교로 변형시켰다.

 

황혼의 해에

이어지는 여러 해 동안에 Ancud교구의 주교로부터 압력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푼타아레나스는 더 이상 지목구의 본부의 소재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살레시안들은 많은 희생을 치루고 일궈놓은 선교지역을 포기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교황청은 솔로몬의 지혜로 191610월에 푼타아레나스를 마젤란의 지목구 본부로 설립하여 두 달 후에 칠레의 살레시오회원 아브라한 아귈레라 신부에게 맡겼다

노인이 된 몬시뇰 파냐노는 권한 정지가 되고 지친데다 용감하였으나 항상 폭리를 남기는 자들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재정운영으로 부채가 많았다. 어쨌든 1916918일 죽음이 그를 찾아와 산티아고에서 삶을 마칠 때까지 아르헨티나에서 칠레로 여행을 계속 하였다. 푼타아레나스의 시민들의 요청으로 광장의 측면에 그 자신이 건설했던 지목구본부 성당 옆에 있는 광장에 파타고니아 주민인 발이 큰 인디언들의 기념비가 높이 세워져 있고 그 곁에 몬시뇰 파냐노가 뭍히게 되었고 그들을 구출하기위해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디언 종족이 사라졌다,

 

남겨진 것은 돈보스코가 단지 꿈에서 보았던 그 땅이, 지워지지 않는 발자취를 남긴 몬시뇰 파냐노나 다른 위대한 살레시안 개척자(don Giovanni Bernabe, don Alberto de Agostini, don Maggiorino Borgatello와 같은) 들의 땀으로 비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함께 기도합시다:

주 예수님,

몬시뇰 요셉 파냐노를 비롯한 당신의 많은 제자들의 자비로운 열정과 대담함과 용기앞에서 기도합니다. 그들은 지구의 모든 구석에서 신앙과 희망의 견고함으로 모든 종류의 도전과 수많은 장애를 극복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저희에게도 저희 형제자매들의 필요성에 열린 마음과 눈을 주소서.

 

마지막까지 쪼개어지고 나누어지고 봉헌된 몬시뇰 요셉 파냐노의 일생을 기억합니다.

그는 일과 절제, 내적인 삶과 다른 사람에 대한 보살핌, 사도적 풍요로움과 한없는 창조력을 연계할 줄 알았습니다. 저희도 새로운 세대에게 희망이 충만한 삶의 기쁜 소식을 선포할 수 있도록 복음의 집, 만남의 집을 젊은이들과 함께 건설하기위해 살레시안의 제가 가겠습니다를 대담하게 물려받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첫째 날 실천사항: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일치시킴으로써 구세주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의 예를 우리 것으로 하여 크나큰 의지의 희생도 감수할 각오를 가지고 제가 가겠습니다라는 살레시오적 자세로 매우 단순하게순명하며 살아갈 것이다.(회헌 32)